1863년~1873년
19세기 세도 정치로 왕권이 땅에 떨어지고 삼정의 문란으로 백성의 삶이 피폐해진 상황에서, 1863년 고종이 즉위하자 흥선대원군이 섭정으로 실권을 장악했다. 그는 안동 김씨 세도 가문의 권력 기반이던 비변사를 축소·폐지하고 의정부와 삼군부의 기능을 되살렸으며, 대전회통과 육전조례를 편찬해 통치 체제를 정비했다.
민생 안정을 위해 양반에게도 군포를 걷는 호포제를 실시하고, 환곡의 폐단을 고치려 마을 단위 자치 운영인 사창제를 시행했다. 또 면세와 민폐의 온상이던 서원을 전국 47개소만 남기고 모두 철폐해 유생들의 격렬한 반발을 샀다.
한편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고자 임진왜란 때 불탄 경복궁을 중건했는데, 그 비용을 마련하려 고액 화폐 당백전을 남발하고 원납전을 강제로 거두어 물가 폭등과 민심 이반을 초래했다. 그의 정책은 전제 왕권 강화와 민생 안정이라는 성과를 냈지만, 전통 체제 안의 개혁이라는 한계를 지녔다.
왕권 강화 · 민생
무리수 · 쇄국
어린 고종 대신 집권한 흥선대원군이 서원 철폐·호포제·사창제로 민생을 다잡고, 경복궁 중건과 당백전 발행, 비변사 축소로 왕권을 강화했다.
왕족이면서도 안동 김씨의 눈을 피해 일부러 파락호 행세를 하며 시정잡배와 어울리던 이하응. 그는 굴욕을 견디며 때를 기다렸고, 마침내 아들이 왕이 되자 칼을 뽑았다.
자신을 무시하던 세도 가문의 소굴 비변사를 부수고, 양반의 성역이던 서원을 철폐하며 '백성을 해치는 자라면 공자가 다시 살아와도 용서하지 않겠다'고 외쳤다. 그러나 왕실의 자존심을 세우겠다는 집념으로 경복궁 중건을 밀어붙이다 당백전 인플레이션으로 민심을 잃는, 빛과 그림자가 뚜렷한 개혁가였다.
몰락한 창업주 가문의 2세가 회장에 오르자마자 전임 경영진의 비선 조직(비변사)을 해체하고, 세금 안 내던 임원들(양반)에게도 4대 보험(호포제)을 물린 격이다. 다만 초호화 신사옥(경복궁)을 짓겠다고 회사채(당백전)를 남발해 재무가 휘청인 것까지 닮았다.
대원군 개혁은 '서·경·호·사·비'로 암기 — 서원 철폐, 경복궁 중건(당백전), 호포제, 사창제, 비변사 혁파.
대원군이 '서!(서원) 경고한다(경복궁), 호(호포제)락호락 안 넘어간다, 사(사창제)정없이 비(비변사)를 쓸어버리겠다!' — 양반들에게 날린 최후통첩으로 기억하자.
군포를 못 내 도망간 이웃의 몫까지 뜯기던 농민들은 양반도 군포를 내게 한 호포제에 통쾌함을 느꼈다. 반면 유생들은 서원 철폐에 '나라의 근본이 무너진다'며 통곡했다. 같은 정책이 누군가에겐 해방, 누군가에겐 세상의 종말이었다.
🏯 불탄 자리에 다시 솟는 경복궁, 그 앞에 산더미처럼 쌓인 당백전 엽전 💰, 무너져 내리는 서원 현판 📜, 그리고 팔짱 낀 채 노려보는 대원군의 형형한 눈빛 👁️.
균역법(영조)
균역법은 군포를 2필에서 1필로 '줄인' 것이고, 호포제는 양반에게도 군포를 '걷은' 것이다. 감면은 영조, 양반 부과는 대원군.
세도 정치기의 비변사
세도 정치기에는 비변사가 최고 권력 기구로 '비대해진' 시기이고, 대원군 때는 그것을 '축소·혁파'한 시기다. 방향이 정반대임을 기억하자.
당백전과 상평통보
상평통보는 조선 후기(숙종) 전국 유통된 법화이고, 당백전은 대원군이 경복궁 중건 비용 마련을 위해 발행한 고액 악화로 물가 폭등을 일으켰다.
세도 정치를 끝내고 국가 기강을 다시 세운 마지막 전통적 개혁이었으나, 대외적으로는 통상 수교 거부로 이어져 근대화의 갈림길에서 문을 닫는 선택의 출발점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