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6년·1871년
병인박해를 구실로 프랑스가 쳐들어온 병인양요(1866, 외규장각 약탈)와 제너럴셔먼호 사건을 구실로 미국이 쳐들어온 신미양요(1871, 어재연 항전) 후 척화비가 세워졌다.
병인박해를 구실로 프랑스가 쳐들어온 병인양요(1866, 외규장각 약탈)와 제너럴셔먼호 사건을 구실로 미국이 쳐들어온 신미양요(1871, 어재연 항전) 후 척화비가 세워졌다.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병인양요 vs 신미양요
광성보의 어재연 장군은 미군의 압도적 화력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았다. 포탄이 떨어지자 병사들은 칼과 창으로, 나중에는 흙과 돌을 던지며 싸웠다. 미군 장교조차 '이토록 처절하게 싸우다 죽는 군인들을 본 적이 없다'고 기록했다. 그의 군영에 걸렸던 장수 깃발 수자기는 전리품으로 미국에 넘어갔다가 136년 만에야 고국 땅을 다시 밟았다. 지키려는 자의 결기가 무엇인지 보여준 전투였다.
글로벌 대기업 두 곳(프랑스·미국)이 문을 안 여는 동네 가게에 잇달아 강제 방문 영업을 시도한 격이다. 가게 주인은 두 번 다 쫓아냈지만, 첫 번째 회사는 나가면서 가게의 귀중한 장부(외규장각 의궤)를 들고 가버렸고, 주인은 '영업 사절' 팻말(척화비)을 대문에 박아버렸다.
'병프외·신미어' — 병인양요는 프랑스·외규장각, 신미양요는 미국·어재연. 원인은 '병박·신셔' — 병인양요의 원인은 병인박해, 신미양요의 원인은 제너럴셔먼호.
'병'원에 간 '프'랑스 환자(병인양요=프랑스), '신'나서 '미'국 간 여행객(신미양요=미국). 어재연의 '어'는 '어딜 감히!'의 어로 기억하자.
낯선 증기선과 대포 소리에 강화도 백성들은 세상이 끝나는 줄 알았다. 목숨 걸고 침략자를 막아낸 자부심과, 소중한 왕실 기록을 눈앞에서 빼앗긴 분노가 뒤섞인 시대였다. 척화비의 강경한 문구에는 그 공포와 결기가 함께 새겨져 있다.
🌊 강화도 앞바다의 시커먼 이양선, 🔥 불타는 제너럴셔먼호, 📚 프랑스 군함에 실려 가는 의궤 상자들, ⚔️ 광성보에 나부끼다 내려지는 수자기, 🪨 길목마다 우뚝 선 척화비.
병인양요 vs 신미양요
병인양요(1866)는 프랑스·병인박해 구실·외규장각 약탈·양헌수, 신미양요(1871)는 미국·제너럴셔먼호 구실·어재연·수자기. '먼저 온 프랑스, 나중 온 미국'으로 구분.
제너럴셔먼호 사건
제너럴셔먼호 사건(1866, 평양)은 신미양요(1871)의 '원인'이지 신미양요 자체가 아니다. 사건과 보복 침공 사이에 5년의 간격이 있음을 기억하자.
오페르트 도굴 사건(1868)
오페르트는 독일 상인이며 남연군 묘 '도굴 미수' 사건이다. 병인·신미양요 같은 군사 침공이 아니고, 두 양요 사이(1868)에 위치한다.
서양 열강의 침략을 두 차례 격퇴하며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이 강화되었으나, 결과적으로 근대 문물 수용이 늦어져 이후 준비 없는 개항을 맞게 되는 배경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