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6년
운요호 사건을 구실로 1876년 체결된 최초의 근대적 조약이자 치외법권·해안 측량권을 허용한 불평등 조약으로, 부산·원산·인천이 개항되었다.
운요호 사건을 구실로 1876년 체결된 최초의 근대적 조약이자 치외법권·해안 측량권을 허용한 불평등 조약으로, 부산·원산·인천이 개항되었다.
강화도 조약(조일 수호 조규)
조미 수호 통상 조약(1882)
1875년 운요호 함장 이노우에는 일부러 조선 수비대의 포격을 유도하는 각본을 짰다. 강화도 초지진에 보트를 접근시켜 조선군이 발포하자 기다렸다는 듯 함포로 응수하고 영종도를 유린했다. 이듬해 일본 사절단은 군함을 끌고 와 '포격의 책임을 지라'며 회담장을 압박했다. 불과 20여 년 전 미국 페리 제독에게 당한 포함 외교를 조선에 그대로 재연한 것이다. 조약문의 '자주국'이라는 달콤한 단어 뒤에는 청을 떼어내고 조선을 삼키려는 계산이 숨어 있었다.
일부러 시비를 걸어 상대의 반격 장면만 찍은 뒤 '폭행'이라며 합의를 강요한 자해 공갈과 같다. 그렇게 맺은 계약서에는 '분쟁 시 상대방 법원에서만 재판한다(치외법권)', '우리 집 구조를 마음대로 실측해도 된다(해안 측량권)'는 독소 조항이 가득했다.
개항장은 '부·원·인' 순서(부산 1876→원산 1880→인천 1883). 핵심 조항은 '자·측·치' — 자주국 명시, 해안 측량권, 치외법권.
'강화도'에서 맺었는데 조선의 처지는 전혀 '강화'되지 않고 '악화'된 조약. 일본이 '운요~ 운 좋다요~' 하며 운요호로 재미 본 사건으로 기억하자.
조약 체결 소식에 최익현은 도끼를 메고 광화문에 엎드려 '왜와 서양은 한통속이니 조약을 맺으려거든 신의 목을 치소서'라고 외쳤다(왜양일체론). 개항이 침략의 문이 될 것을 꿰뚫어 본 이들의 절박함과, 밀려오는 시대의 파도 앞에 선 조선의 불안이 교차하던 순간이었다.
⚓ 강화도 앞바다에 정박한 일본 군함의 검은 연기, 📜 회담장 탁자 위의 조약문과 그 곁의 군도, 🚢 하나둘 열리는 부산·원산·인천 항구의 문, 🪓 도끼를 메고 엎드린 최익현.
조미 수호 통상 조약(1882)
강화도 조약에는 없는 '최혜국 대우'와 '거중 조정', '관세' 조항이 조미 조약에는 있다. 조선책략 유입과 청의 알선으로 맺어진 것도 조미 조약이다.
조일 무역 규칙(1876)
강화도 조약의 부속 조약으로, 무관세와 양곡의 무제한 유출을 허용했다. 관세권 회복은 1883년 조일 통상 장정 개정 때이며 이때 방곡령 규정도 들어갔다.
제1관 '조선은 자주국'
조선을 존중한 조항이 아니라 청의 종주권을 부정해 일본이 단독으로 조선을 요리하려는 의도였다. '자주국=우대 조항'으로 읽으면 함정에 빠진다.
조선이 문호를 개방하고 세계 질서에 편입된 역사적 전환점이지만, 불평등 조약 체제의 시작으로 이후 열강과의 조약에서 연쇄적인 주권 침해를 낳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