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0년~1881년
정부는 통리기무아문과 별기군을 설치하고 수신사·조사 시찰단·영선사를 파견했으며, 이에 맞서 이만손의 영남 만인소 등 위정척사 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다.
정부는 통리기무아문과 별기군을 설치하고 수신사·조사 시찰단·영선사를 파견했으며, 이에 맞서 이만손의 영남 만인소 등 위정척사 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다.
개화 정책의 추진과 위정척사 운동
조사 시찰단 vs 영선사
2차 수신사 김홍집은 일본에서 청나라 외교관 황준헌을 만나 한 권의 책을 받아 든다. 러시아를 막으려면 '중국과 친하고, 일본과 손잡고, 미국과 이어져야 한다'는 조선책략이었다. 그는 이 책이 조선의 살길을 담았다고 믿고 고종에게 바쳤지만, 책이 유포되자 영남 유생 1만여 명의 분노가 만인소가 되어 한양으로 밀려들었다. '공자와 맹자의 나라가 오랑캐와 손을 잡다니!' 나라를 구하려는 두 개의 진심이 서로를 매국과 수구로 부르며 충돌하고 있었다.
전통 기업이 디지털 전환 TF(통리기무아문)를 꾸리고 해외 연수단(수신사·조사 시찰단·영선사)을 보내며 신기술 인력(별기군)을 채용하자, '창업주의 경영 철학이 무너진다'며 원로 임직원 1만 명이 연판장(영남 만인소)을 돌린 상황과 같다.
사절단은 '수일·조일비·영청기·보미' — 수신사는 일본, 조사 시찰단은 일본 비밀 파견, 영선사는 청(기기창), 보빙사는 미국. 위정척사는 '통·개·개·항' 흐름 — 60년대 통상 반대, 70년대 개항 반대, 80년대 개화 반대, 90년대 항일 의병.
영선사는 '영~ 선사받으러' 청나라에 무기 기술 선물 받으러 간 팀. 조사 시찰단은 몰래 갔으니 '조사(스파이) 시찰단'. 이만손은 만인소를 올렸으니 이름부터 '이만(2만)손'이 아니라 '일만(1만) 손'이 모였다고 기억하자.
개화파 청년들은 일본의 철도와 공장을 보고 '이대로면 조선은 끝난다'는 조바심에 밤잠을 설쳤고, 유생들은 수백 년 지켜온 도리가 무너진다는 공포에 상소문에 목숨을 걸었다. 양쪽 모두 나라를 사랑했기에 갈등은 더 격렬했다.
🏛️ 현판을 새로 단 통리기무아문, 🎖️ 신식 소총을 든 별기군과 낡은 화승총의 구식 군인 대비, 🚢 일본과 청으로 떠나는 사절단의 배, 📜 한양으로 밀려드는 만인소 두루마리 행렬.
조사 시찰단 vs 영선사
조사 시찰단은 '일본'에 암행어사 형식으로 비밀 파견되어 근대 시설을 시찰했고, 영선사는 '청' 톈진에서 무기 제조 기술을 배워 기기창 설치의 계기가 되었다. 행선지와 목적이 다르다.
수신사 vs 통신사
통신사는 조선 전기~후기에 일본에 '문화를 전해 주던' 사절이고, 수신사는 개항 후 일본의 근대 문물을 '배우러 간' 사절이다. 문화 전파의 방향이 역전된 것이 포인트다.
영남 만인소의 대상
이만손의 영남 만인소(1881)는 강화도 조약이 아니라 '조선책략 유포와 미국과의 수교 움직임'에 반대한 것이다. 개항 반대(1876 최익현)와 시기·대상을 구분하자.
근대 국가로 나아가려는 개화의 흐름과 전통 질서를 지키려는 척사의 흐름이 정면충돌한 시기로, 이 갈등 구도가 이후 개항기 정치 변동 전체를 규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