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2년
개화 정책으로 창설된 별기군이 좋은 대우를 받는 동안 구식 군인들은 5군영이 2영으로 축소되며 일자리를 잃거나 13개월씩 급료가 밀리는 차별에 시달렸다. 1882년 6월 밀린 급료로 지급된 쌀에 겨와 모래가 섞여 있자 분노가 폭발해, 구식 군인들은 선혜청 당상 민겸호의 집을 부수고 일본인 교관을 살해했으며 일본 공사관을 습격했다.
개항 후 쌀값 폭등에 시달리던 도시 하층민도 합세해 궁궐까지 밀고 들어가자 명성황후는 장호원으로 피신했고, 고종은 사태 수습을 위해 흥선대원군을 불러들였다. 재집권한 대원군은 별기군과 통리기무아문을 폐지하고 5군영을 부활시켰으나, 민씨 세력의 요청으로 파병된 청군이 군란을 진압하고 대원군을 톈진으로 압송하면서 약 한 달 만에 막을 내렸다.
그 결과 일본과는 배상금 지불과 일본 공사관 경비병 주둔을 허용한 제물포 조약을 맺었고, 청과는 청 상인의 내지 통상권을 허용하고 조선을 속방으로 명시한 조청 상민 수륙 무역 장정을 체결했다. 이후 청은 마젠창과 묄렌도르프를 고문으로 파견하고 군대를 주둔시키며 조선 내정을 깊숙이 간섭했다.
1882년 별기군과 차별받던 구식 군인들이 봉기해 대원군이 잠시 재집권했으나 청군이 진압, 제물포 조약 체결과 청의 내정 간섭 심화를 낳았다.
임오군란
제물포 조약 vs 한성 조약
13개월을 굶주리며 기다린 구식 군인들 손에 쥐어진 것은 겨와 모래가 반이나 섞인 썩은 쌀 한 됫박이었다. 항의하던 동료들이 오히려 체포되어 처형될 위기에 놓이자, 그들은 '어차피 죽을 바에는'이라며 무기고를 털었다.
신식 군복을 입고 좋은 대우를 받는 별기군, 그들을 훈련시키는 일본인 교관, 뒤에서 배를 불리는 민씨 척족까지, 쌓인 분노는 도시 빈민의 합류로 걷잡을 수 없이 번졌다. 그러나 그들의 봉기는 결국 청군의 총칼 앞에 무너졌고, 조선의 하늘에는 청과 일본이라는 두 그림자가 더 짙게 드리워졌다.
회사가 신규 채용한 별동 팀(별기군)에만 연봉과 장비를 몰아주고 기존 직원(구식 군인)은 13개월 월급 체불 끝에 상한 식권으로 때우자 파업이 폭발한 격이다. 그런데 사측이 자체 해결 대신 외부 용역(청군)을 불러 진압하면서, 이후 회사 경영권까지 그 용역 회사에 휘둘리게 된 셈이다.
임오군란 결과는 '대·제·장' — 대원군 재집권(→청 압송), 제물포 조약, 조청 상민 수륙 무역 장정. 배경은 '별기군 우대 vs 구식 군인 차별'.
'임오'년에 '임금(월급)이 오'질 않아서 터진 군란으로 기억하자. 제물포 조약은 일본에 '제물(배상금)'을 바친 조약이라고 외우면 임오군란-일본 연결이 안 헷갈린다.
나라를 지켜 온 군인이 가족을 굶기다 모래 섞인 쌀을 받았을 때의 모멸감을 상상해 보라. 이것은 단순한 폭동이 아니라 개화의 그늘에서 버려진 사람들의 절규였다. 그러나 그 절규가 외세의 개입을 불러왔다는 비극이 이 사건의 가장 아픈 지점이다.
🍚 겨와 모래가 섞인 쌀자루를 움켜쥔 거친 손, 🔥 불타는 일본 공사관, 🏯 다시 운현궁에서 나오는 대원군의 가마, ⛓️ 청 군함에 실려 톈진으로 끌려가는 대원군.
제물포 조약 vs 한성 조약
둘 다 일본과 맺은 배상 조약이지만 제물포 조약은 '임오군란(1882)' 결과로 공사관 경비병 주둔을 허용했고, 한성 조약은 '갑신정변(1884)' 결과다. '임-제, 갑-한'으로 짝지어 암기.
조청 상민 수륙 무역 장정 vs 조일 통상 장정
조청 상민 수륙 무역 장정(1882)은 청 상인의 '내지 통상'을 허용하고 조선을 속방으로 명시했다. 조일 통상 장정(1883 개정)은 일본과의 관세·방곡령 규정이 핵심이다.
대원군의 두 번째 실각
임오군란 때 대원군은 '재집권 후 청에 압송'된 것이지 스스로 물러난 것이 아니다. 1873년 최익현 상소로 실각한 1차 하야와 구분해야 한다.
개화 정책에 대한 최초의 대규모 반발로, 이를 진압한 청의 내정 간섭이 본격화되어 조선의 자주적 개화가 좌절되고 갑신정변의 원인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