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년
정미 7조약으로 군대까지 해산시킨 일제는 1909년 기유각서를 강요해 사법권과 감옥 사무를 박탈하고, 1910년 6월에는 경찰권마저 빼앗아 병합의 수순을 밟았다. 1909년 10월 26일, 연해주에서 단지동맹으로 결의를 다진 대한의군 참모중장 안중근은 하얼빈역에서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고 코레아 우라를 외쳤다.
그는 뤼순 감옥에서 자신은 개인 자격의 살인범이 아니라 독립 전쟁 중의 군인이라 주장하며 동양평화론을 집필하다 순국했다. 그러나 이미 병합을 결정한 일제는 1910년 8월 22일 친일 내각의 이완용과 3대 통감 데라우치 사이에 한일병합조약을 체결하고 29일 공포했다.
순종의 서명 없이 강제된 이 조약으로 대한제국은 국권을 완전히 상실했고, 통감부는 조선총독부로 바뀌어 무단 통치가 시작되었다. 경술년의 나라의 치욕이라 하여 경술국치라 부르며, 이후 35년간의 일제강점기가 이어진다.
1909년 안중근이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했으나 기유각서로 사법권마저 빼앗겼고, 1910년 한일병합조약으로 국권을 상실했다.
국권 피탈(경술국치)
정미 7조약과 기유각서
연해주의 청년 안중근은 동지들과 왼손 약지를 끊어 태극기에 대한독립이라 혈서를 쓰며 맹세했다. 1909년 10월 26일 아침 하얼빈역, 러시아 의장대 사이로 걸어 나오는 이토 히로부미를 향해 그는 세 발의 총탄을 명중시키고 러시아어로 코레아 우라, 대한 만세를 외쳤다.
법정에서 그는 나는 자객이 아니라 대한의군 참모중장으로서 적장을 처단한 것이니 국제법으로 재판하라고 당당히 요구했고, 뤼순 감옥에서 동양 3국이 평화롭게 공존하는 길을 담은 동양평화론을 쓰다가 서른한 살에 순국했다. 그러나 열 달 뒤, 이완용의 도장 하나로 나라는 문서 위에서 사라졌다.
적대적 인수합병의 마지막 단계와 같다. 외교권(대외 계약)·군대(보안팀)·사법권(법무팀)·경찰권(감사팀)을 차례로 넘겨받은 뒤, 마지막에 회사 등기 자체를 말소시킨 것이 한일병합조약이다. 안중근 의거는 인수를 지휘한 전 회장을 최후의 순간에 응징한 사건이다.
피탈 순서는 '외·군·사·경·병'으로 암기. 외교권(을사 1905)→군대 해산(정미 7조약 1907)→사법권(기유각서 1909)→경찰권(1910.6)→병합(1910.8). 안중근 의거일은 10월 26일, 하얼빈의 '하'를 열(10)고 이(2)토를 육(6)혈포로 쏘았다고 연상.
기유각서로 사법권을 빼앗기니 기가 유출되고 각서만 남았다. 경술년의 국치라 경술국치, 술이 깨듯 정신 차려보니 나라가 없어진 해다.
순종의 서명조차 없이 나라가 사라진 날, 황현은 절명시를 남기고 자결했고 백성들은 소리 내어 울지도 못했다. 안중근이 감옥에서 어머니가 지어 보낸 수의를 입고 의연히 떠난 이야기까지, 상실의 슬픔과 꺾이지 않는 의기를 함께 기억해야 한다.
🚂 하얼빈역 플랫폼, 증기 기관차의 연기 속에 울린 세 발의 총성과 휘날린 태극기. ✋ 약지가 잘린 안중근의 단지 수인(手印) 도장.
⛓️ 뤼순 감옥 독방에서 붓으로 동양평화론을 쓰는 모습. 📜 1910년 8월 29일 관보에 실린 병합 조칙.
정미 7조약과 기유각서
정미 7조약(1907)은 차관 정치와 군대 해산, 기유각서(1909)는 사법권·감옥 사무 박탈. 군대는 정미, 사법은 기유로 짝을 고정해 순서 배열 문제에 대비한다.
장인환·전명운 의거
장인환·전명운은 1908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친일 외교 고문 스티븐스를 사살했고, 안중근은 1909년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했다. 장소와 대상이 뒤바뀐 오답에 주의한다.
이재명 의거
이재명은 1909년 명동성당 앞에서 이완용을 칼로 찔러 중상을 입혔으나 처단에는 실패했다. 이완용 습격은 이재명, 이토 사살은 안중근으로 구분한다.
500년 조선 왕조와 대한제국이 막을 내리고 국권을 상실한 민족사 최대의 비극이자, 이후 모든 독립운동이 국권 회복이라는 하나의 목표로 수렴하게 된 출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