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제국

1908년

항일 의병 운동

👑 순종★★★☆☆자주 출제추정 ·최근 20회 중 7회 · 3회 중 1회꼴 출제

을미·을사·정미의병으로 이어진 항일 의병은 해산 군인이 합류한 13도 창의군이 1908년 서울 진공 작전을 시도하며 절정에 달했다.

시험장 인출 순서연도사건키워드함정

한눈에 보기

시대 흐름 속 이 사건의 자리

  1. 1898년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2. 1905년을사늑약
  3. 1907년애국계몽운동과 국채보상운동
  4. 1908년항일 의병 운동

    을미·을사·정미의병으로 이어진 항일 의병은 해산 군인이 합류한 13도 창의군이 1908년 서울 진공 작전을 시도하며 절정에 달했다.

  5. 1910년국권 피탈(경술국치)

가장 많이 헷갈리는 지점

항일 의병 운동

  • ·1908년
  • ·을미·을사·정미의병으로 이어진 항일 의병은 해산 군인이 합류한 13도 창의군이 1908년 서울 진공 작전을 시도하며 절정에 달했다.

을미의병과 을사의병의 주도층

  • ·을미의병은 유인석 등 위정척사 유생 중심이고 단발령 철회와 고종 권고 조칙으로 해산했다. 평민 의병장 신돌석의 등장은 을사의병부터라는 점이 핵심 구분이다.
VS

스토리텔링

위정척사의 노유학자 최익현은 을사늑약 소식에 일흔넷의 나이로 의병을 일으켰다. 관군이 진압하러 오자 같은 동포끼리 싸울 수 없다며 스스로 붙잡혔고, 쓰시마섬에서 적이 주는 곡식은 먹지 않겠다는 기개 속에 순국했다. 한편 경상도 산골의 평민 신돌석은 양반이 아니라는 이유로 무시받던 세상에서 태백산 호랑이로 불리며 일본군을 벌벌 떨게 했다. 1907년 군대가 해산되던 날 박승환 대대장이 군인으로서 나라를 지키지 못하니 죽음뿐이라며 권총으로 자결하자, 병영을 뛰쳐나온 군인들이 총을 든 채 의병 대열에 합류했다. 유생과 농민과 군인이 한 깃발 아래 서울로 진격한 것이다.

현대 비유

정리해고된 정예 직원들(해산 군인)이 시민 봉사단(의병)에 합류해 전문성이 급상승한 조직이 본사 탈환 작전(서울 진공 작전)에 나선 격이다. 13도 창의군의 영사관 서신은 국제 사회에 우리는 폭도가 아니라 정식 교전국 군대라고 보낸 공식 보도자료다.

암기법

의병 3단계는 '미·사·미'가 아니라 '을미-단발, 을사-최신(최익현·신돌석), 정미-군대 해산'으로 암기. 13도 창의군은 '이인영 총대장, 허위 군사장'을 이(2)총-허(3)군으로 연결.

말장난 암기

단발령에 뚜껑 열려 을미의병, 을사늑약에 을컥해서 을사의병, 군대 해산에 정말 미쳐버려 정미의병. 신돌석은 돌직구로 일본군을 석권한 태백산 호랑이.

감정 연결

군복을 벗으라는 명령에 총구를 자신에게 돌린 군인, 백발을 휘날리며 창을 든 유학자, 낫을 총으로 바꿔 든 농민. 질 것을 알면서도 싸울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의 비장함이 이 단원의 정서다.

장면 상상

🐯 태백산 능선을 달리는 평민 의병장 신돌석의 부대. 🪖 해산되던 날 찢긴 군모와 박승환의 유서. ⚔️ 눈 덮인 양주 벌판에 모인 13도 창의군 1만 명이 서울 도성을 바라보는 장면. 🏹 프레더릭 매켄지가 찍은 정미의병 사진.

실수 방지 — 헷갈리면 여기서 틀린다

을미의병과 을사의병의 주도층

을미의병은 유인석 등 위정척사 유생 중심이고 단발령 철회와 고종 권고 조칙으로 해산했다. 평민 의병장 신돌석의 등장은 을사의병부터라는 점이 핵심 구분이다.

정미의병의 계기

정미의병의 직접 계기는 고종 강제 퇴위와 군대 해산(1907)이다. 을사늑약(외교권 박탈)을 계기로 고르면 오답이며, 해산 군인 합류로 전투력이 강화됐다는 선지가 정답이 된다.

남한 대토벌 작전

남한 대토벌 작전(1909)은 일제가 호남 의병을 진압한 작전으로 의병이 일으킨 사건이 아니다. 이 작전 이후 의병이 만주·연해주로 이동했다는 흐름으로 출제된다.

관련 인물
유인석이소응최익현신돌석박승환이인영허위
관련 문화재·유물
매켄지의 정미의병 사진13도 창의군 격문
유생에서 평민·군인까지 전 계층이 무장 투쟁으로 국권 수호에 나선 구국 운동으로, 만주·연해주 독립군과 무장 독립 전쟁의 원류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