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1938년·1940년

조선의용대와 한국광복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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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김원봉의 조선의용대에 이어 1940년 충칭에서 지청천 총사령의 한국광복군이 창설되어 대일 선전 포고와 국내 진공 작전을 준비했다.

시험장 인출 순서연도사건키워드함정

한눈에 보기

시대 흐름 속 이 사건의 자리

  1. 1926~1927년6·10 만세 운동과 신간회
  2. 1929년광주 학생 항일 운동
  3. 1930년대 이후민족 말살 통치
  4. 1931년한인 애국단
  5. 1938년·1940년조선의용대와 한국광복군

    1938년 김원봉의 조선의용대에 이어 1940년 충칭에서 지청천 총사령의 한국광복군이 창설되어 대일 선전 포고와 국내 진공 작전을 준비했다.

가장 많이 헷갈리는 지점

조선의용대와 한국광복군

  • ·1938년·1940년
  • ·1938년 김원봉의 조선의용대에 이어 1940년 충칭에서 지청천 총사령의 한국광복군이 창설되어 대일 선전 포고와 국내 진공 작전을 준비했다.

조선의용대 vs 한국광복군

  • ·조선의용대는 1938년 김원봉이 우한에서 만든 중국 관내 최초의 한인 부대, 한국광복군은 1940년 임시정부가 충칭에서 창설한 정규군(총사령 지청천)이다. 창설 주체와 연도로 구분한다.
VS

스토리텔링

의열단 단장에서 조선의용대 대장이 된 김원봉과, 임시정부 광복군 총사령 지청천. 다른 길을 걸어온 두 무장이 충칭에서 만났다. 태평양 전쟁이 터지자 임시정부는 당당히 일본에 선전 포고를 던졌고, 1942년 김원봉은 부대를 이끌고 광복군에 합류해 손을 잡았다. 시안의 훈련장에서 청년 대원들은 미국 OSS 교관 밑에서 낙하산과 무전, 폭파 훈련을 받으며 조국 침투의 날만 기다렸다. 그러나 1945년 8월, 출동 직전에 일제 항복 소식이 날아들었다. 환호해야 할 순간, 김구는 붓을 놓고 탄식했다. '우리 손으로 왜적을 몰아낼 기회를 잃었으니, 이것이 훗날 무슨 화가 될 것인가.'

현대 비유

오랜 준비 끝에 결승 무대 입장 직전 대회 자체가 취소된 국가대표팀과 같다. 승리는 왔지만 자기 손으로 증명할 기회를 놓친 것, 그것이 광복군의 한이자 해방 정국 혼란의 복선이었다.

암기법

'삼팔 의용, 사공 광복' — 1938년 조선의용대(김원봉), 1940년 한국광복군(지청천). 광복군 3대 활동은 '선인오' — 선전 포고(1941), 인도·미얀마 파견, OSS 국내 진공 준비.

말장난 암기

조선의용대는 '의'리로 '용'감하게 싸운 부대, 한국광복군은 이름부터 '광복'이 목표인 군대. 지청천은 '청천'벽력처럼 일제를 치려 했고, OSS 작전은 '오~ 쓸 만했는데' 무산됐다.

감정 연결

광복 소식에 만세 대신 탄식이 나온 역설. 조국 하늘로 낙하할 날만 기다리던 청년들의 허탈함과, 스스로 쟁취하지 못한 해방이 남길 그림자를 내다본 김구의 통한을 함께 기억해야 한다.

장면 상상

충칭 광복군 총사령부 현판 아래 도열한 병사들, 시안 훈련장의 낙하산, 그리고 펼쳐진 대일 선전 포고문. 🪖🪂📜

실수 방지 — 헷갈리면 여기서 틀린다

조선의용대 vs 한국광복군

조선의용대는 1938년 김원봉이 우한에서 만든 중국 관내 최초의 한인 부대, 한국광복군은 1940년 임시정부가 충칭에서 창설한 정규군(총사령 지청천)이다. 창설 주체와 연도로 구분한다.

조선의용군(화북)

조선의용대 화북지대가 개편된 조선의용군은 사회주의 계열로 중국 공산당과 연계해 싸웠고, 광복 후 북한 인민군에 편입되었다. 광복군과는 노선이 다르다.

국내 진공 작전의 결말

OSS와 준비한 국내 진공 작전은 '실행'된 것이 아니라 일제의 항복으로 '무산'되었다. 실행했다고 서술한 보기는 오답이다.

관련 인물
김원봉지청천이범석김구
관련 문화재·유물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성립 전례식 사진대일 선전 포고문충칭 임시정부 청사
임시정부가 정규군을 갖추고 연합국의 일원으로 대일전에 참전함으로써 무장 독립 전쟁의 대미를 장식했다. 비록 국내 진공은 무산되었지만 광복이 우리 스스로의 투쟁 위에 서 있음을 보여 주는 근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