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1931년

한인 애국단

★★★☆☆자주 출제추정 ·최근 20회 중 7회 · 3회 중 1회꼴 출제

1931년 김구가 침체된 임시정부를 살리기 위해 조직, 이봉창의 도쿄 의거와 윤봉길의 훙커우 공원 의거로 중국 국민당의 지원을 이끌어냈다.

시험장 인출 순서연도사건키워드함정

한눈에 보기

시대 흐름 속 이 사건의 자리

  1. 1926~1927년6·10 만세 운동과 신간회
  2. 1929년광주 학생 항일 운동
  3. 1930년대 이후민족 말살 통치
  4. 1931년한인 애국단

    1931년 김구가 침체된 임시정부를 살리기 위해 조직, 이봉창의 도쿄 의거와 윤봉길의 훙커우 공원 의거로 중국 국민당의 지원을 이끌어냈다.

  5. 1938년·1940년조선의용대와 한국광복군

가장 많이 헷갈리는 지점

한인 애국단

  • ·1931년
  • ·1931년 김구가 침체된 임시정부를 살리기 위해 조직, 이봉창의 도쿄 의거와 윤봉길의 훙커우 공원 의거로 중국 국민당의 지원을 이끌어냈다.

의열단(1919, 김원봉)

  • ·의열단은 김원봉이 1919년 조직(김익상·김상옥·나석주), 한인 애국단은 김구가 1931년 조직(이봉창·윤봉길). 단장과 단원 매칭을 바꿔 내는 최다 빈출 함정이다.
VS

스토리텔링

일본에서 노동자로 살며 일본어에 능통했던 이봉창은 어느 날 김구를 찾아와 웃으며 말했다. '인생의 절반을 일본에서 재미있게 살았으니, 남은 절반은 독립을 위해 쓰겠습니다.' 그는 수류탄을 들고 환하게 웃는 사진을 남기고 도쿄로 떠났다. 몇 달 뒤, 두 아들을 둔 스물넷의 가장 윤봉길이 같은 자리에 섰다. 거사 아침, 그는 김구와 시계를 바꾸며 말했다. '제 시계는 앞으로 한 시간밖에 쓸 일이 없습니다.' 훙커우 공원의 폭음이 울린 뒤, 백범은 평생 그 시계를 품고 다녔다. 두 청년의 목숨이 죽어 가던 임시정부를 살렸다.

현대 비유

파산 직전의 조직이 사활을 건 단 두 번의 승부수로 세계적 주목과 대형 투자자(중국 국민당)의 전폭 지원을 얻어낸 극적인 재기 스토리다.

암기법

'이도일, 윤훙사' — 이봉창은 도쿄에서 일왕에게(1932.1), 윤봉길은 훙커우에서 4월에(1932.4). 조직은 김구의 한인 애국단(1931), 결과는 중국 국민당 지원.

말장난 암기

이봉창·윤봉길, 두 '봉'이 일제에 제대로 '봉'변을 안겼다. 윤봉길의 폭탄은 물통과 도시락 모양, 그래서 '도시락 싸 들고 가서 던졌다'로 외운다.

감정 연결

웃으며 죽음의 길을 떠난 두 청년의 사진 속 미소. 남은 시간이 한 시간뿐이라며 시계를 바꾸던 그 담담함이야말로 절망의 시대가 낳은 가장 뜨거운 희망이었다.

장면 상상

태극기 앞에서 수류탄을 들고 환히 웃는 이봉창, 물통 폭탄을 멘 윤봉길, 그리고 맞바꾼 두 개의 회중시계. 💣⌚🇰🇷

실수 방지 — 헷갈리면 여기서 틀린다

의열단(1919, 김원봉)

의열단은 김원봉이 1919년 조직(김익상·김상옥·나석주), 한인 애국단은 김구가 1931년 조직(이봉창·윤봉길). 단장과 단원 매칭을 바꿔 내는 최다 빈출 함정이다.

이봉창 의거와 윤봉길 의거

이봉창은 1932년 1월 도쿄에서 일왕 행렬에, 윤봉길은 1932년 4월 상하이 훙커우 공원 기념식장에 투탄했다. 장소-인물을 뒤바꾼 오답에 주의한다.

안중근 의거(1909)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처단은 국권 피탈 이전인 1909년 하얼빈에서의 일이다. 한인 애국단(1930년대)과 시기가 완전히 다르다.

관련 인물
김구이봉창윤봉길장제스
관련 문화재·유물
이봉창 의사 선서문과 사진윤봉길 의사 회중시계훙커우 공원(루쉰 공원) 매정
두 의거는 한국 독립 의지를 전 세계에 알리고 중국 국민당 정부의 지원을 이끌어내 이후 한국광복군 창설의 토대를 놓았다. 절망에 빠졌던 임시정부를 기사회생시킨 결정적 사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