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0년
소수림왕이 정비한 체제 위에서 18세에 즉위한 광개토대왕은 즉위 직후부터 정복 전쟁을 이어갔다. 남쪽으로 백제를 공격해 한강 이북 지역을 확보하고 아신왕의 항복을 받아냈으며, 북쪽으로는 거란과 후연을 격파하고 동부여와 숙신을 복속시켜 만주의 광대한 영토를 차지했다.
400년에는 왜의 침입으로 위기에 몰린 신라 내물왕의 구원 요청에 5만 군사를 보내 왜군을 격퇴했는데, 이때 왜와 연결되어 있던 금관가야까지 타격을 입어 가야 연맹의 주도권이 대가야로 넘어가는 계기가 되었다. 경주 호우총에서 나온 호우명 그릇은 이 시기 고구려가 신라에 강한 영향력을 행사했음을 보여준다.
그는 영락이라는 독자 연호를 사용해 중국과 대등한 천하관을 드러냈다. 그의 업적은 아들 장수왕이 세운 광개토대왕릉비에 새겨져 전한다.
광개토대왕은 만주를 정복하고 400년 신라를 구원해 한반도 남부까지 영향력을 떨쳤다. 호우명 그릇이 그 증거다.
광개토대왕의 정복 활동
광개토대왕릉비의 건립 주체
광개토대왕은 할아버지 고국원왕의 원수를 갚겠다는 집안의 숙원을 안고 자란 청년이었다. 즉위하자마자 백제를 몰아붙여 아신왕에게 무릎을 꿇렸을 때 그의 나이 겨우 20대 초반이었다.
그런데 그의 진짜 야망은 복수 너머에 있었다. 만주 벌판을 내달리며 거란과 후연을 꺾고, 남쪽에서 신라가 '왜가 쳐들어왔다'고 SOS를 치자 5만 대군을 즉시 파병했다. 은혜를 입은 신라는 사실상 고구려의 그늘 아래 들어갔고, 그는 '영락'이라는 자기만의 연호로 시간을 세는, 스스로 천하의 중심이 된 왕이었다.
국내 라이벌전(백제)을 끝내고 해외 시장(만주)까지 석권한 글로벌 기업 총수다. 위기에 빠진 협력사(신라)에 긴급 자금(5만 대군)을 지원하고 사실상 지분(영향력)을 확보했으며, 독자 연호 '영락'은 자체 OS를 출시한 격이다.
광개토 '만.신.영.호' — 만주 정복, 신라 구원(400), 영락 연호, 호우명 그릇.
'광개토' = 땅(토)을 광(넓게)~ 개(열어)젖힌 왕. 400년 신라 구원은 '사(4)백 년에 오(5)만 명' — 400년, 5만 군사.
왜군에게 수도까지 짓밟히던 신라 백성에게 북쪽에서 내려온 고구려 기병 5만은 하늘이 보낸 구원군이었다. 동시에 신라 지배층은 '구원의 대가는 종속'이라는 쓴맛도 함께 삼켜야 했다.
🐎 만주 벌판을 검은 기병대가 지평선까지 내달리고, 남쪽 경주에서는 왜군이 바다로 도망친다. 무덤 속에서 빛나는 청동 그릇에 '광개토지호태왕' 명문이 새겨진 장면 🏺.
광개토대왕릉비의 건립 주체
비의 내용은 광개토대왕의 업적이지만 세운 사람은 아들 장수왕(414년). '업적은 아버지, 건립은 아들'로 기억.
법흥왕의 건원 연호
영락은 고구려 광개토대왕(최초의 독자 연호), 건원은 신라 법흥왕. 연호-왕 짝짓기 오답이 단골이다.
칠지도
호우명 그릇은 고구려-신라 관계(경주 호우총 출토), 칠지도는 백제-왜 관계. 유물로 나라 관계를 묻는 문제에서 혼동 주의.
고구려를 동북아시아 최강국으로 끌어올렸고, 신라 구원을 계기로 한반도 남부의 세력 판도(가야 쇠퇴, 신라 내 고구려 영향력)까지 바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