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1년
1811년 홍경래는 평안도(서북) 차별에 맞서 봉기했고, 1862년 임술 농민 봉기는 진주 백낙신의 탐학에서 시작되어 정부가 삼정이정청을 설치했다.
1811년 홍경래는 평안도(서북) 차별에 맞서 봉기했고, 1862년 임술 농민 봉기는 진주 백낙신의 탐학에서 시작되어 정부가 삼정이정청을 설치했다.
홍경래의 난과 임술 농민 봉기
홍경래의 난 vs 임술 농민 봉기
홍경래는 과거에 급제할 실력이 있어도 평안도 출신이라는 이유로 출셋길이 막힌 몰락 양반이었다. '조정이 서북 땅을 버린 지 400년'이라는 그의 격문에 차별받던 상인과 광산 노동자, 굶주린 농민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열흘 만에 청천강 이북 여덟 고을이 무너졌지만, 관군에 밀려 정주성에 갇힌 그들은 눈보라 속 다섯 달을 버티다 성벽 폭파와 함께 최후를 맞았다. 51년 뒤 진주에서는 백낙신의 수탈에 견디다 못한 농민들이 흰 수건을 두르고 관아로 몰려갔고, 그 불길은 전국으로 번져 조선의 지배층을 뿌리부터 뒤흔들었다.
홍경래의 난은 상습적인 지역 차별 인사에 뿔난 지방 지사 직원들의 집단 반란이고, 임술 봉기는 갑질 지점장(백낙신)의 횡령이 도화선이 되어 전국 지점으로 번진 총파업이다. 삼정이정청은 여론에 밀려 급조된 '적폐청산 TF'였지만 성과 없이 해산됐다.
'1811 홍경래는 차별 때문에, 1862 임술은 삼정 때문에'. 키워드 짝은 '홍-평안도-정주성 / 임-진주-백낙신-유계춘-박규수-삼정이정청'.
'홍경래는 서북에서 홧(火)경래', '백낙신이 백성 등골을 낙낙하게 뜯어 임술년에 다 일어났다'. 정주성은 '정말 주저앉을 때까지 버틴 성'.
태어난 지역 때문에 미래가 닫힌 청년의 분노와, 아무리 일해도 수탈로 빈손인 농민의 절망. 낫과 죽창은 그들이 가진 마지막 언어였다.
눈보라 치는 정주성 위에 펄럭이는 봉기군의 깃발, 흰 수건을 머리에 두르고 진주 관아로 몰려가는 농민들의 횃불 행렬. 🏴❄️🔥
홍경래의 난 vs 임술 농민 봉기
홍경래(1811)는 평안도 '지역 차별'이 핵심 원인, 임술(1862)은 '삼정의 문란'이 핵심 원인. 원인을 서로 바꿔 내는 것이 대표 함정이다.
삼정이정청 vs 교정청
삼정이정청은 임술 봉기 수습책(1862), 교정청은 동학 농민 운동 후 개혁 기구(1894). 설치 계기가 되는 사건이 다르다.
동학 농민 운동(1894)
임술 봉기는 종교 조직 없는 자연 발생적 봉기, 동학 농민 운동은 동학 조직 기반의 전국적 항쟁. 임술이 30년 앞선다.
세도 정치의 모순에 맞선 대규모 농민 저항으로, 농민이 사회 변혁의 주체로 성장해 동학 농민 운동의 토대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