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8년
원을 몰아내고 중국의 새 주인이 된 명은 1388년 철령 이북 땅이 원래 원의 것이었다며 철령위 설치를 통보해 왔다. 격분한 우왕과 최영은 요동 정벌을 결정했으나, 이성계는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칠 수 없고, 여름철 출병은 불리하며, 왜구가 빈틈을 노릴 것이고, 장마철에 활의 아교가 풀리고 전염병이 돈다는 4불가론으로 반대했다.
그럼에도 출병이 강행되자 이성계는 압록강 위화도에서 진군을 멈추고 회군을 단행해 개경으로 쳐들어가 최영을 제거하고 우왕을 폐위했다. 군사권과 정권을 장악한 이성계는 정도전 등 급진 신진 사대부와 손잡고 개혁에 나서, 1391년 과전법을 시행해 권문세족의 대농장을 해체하고 신진 관료의 경제 기반을 마련했다.
폐가입진을 명분으로 창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세운 뒤, 새 왕조 개창에 반대하던 온건파 정몽주가 선죽교에서 살해되자 마지막 걸림돌이 사라졌다. 1392년 이성계가 왕위에 올라 고려는 474년 만에 멸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었다. 위화도 회군은 군사 정변인 동시에 권문세족의 구체제를 무너뜨리고 새 왕조로 가는 결정적 분기점이었다.
1388년 요동 정벌에 나선 이성계가 4불가론을 내세워 위화도에서 회군해 권력을 잡고, 1391년 과전법을 거쳐 1392년 고려가 멸망했다.
위화도 회군과 고려의 멸망
최영의 요동 정벌론
홍건적과 왜구를 무찌르며 백성의 영웅이 된 무장 이성계는, 요동 정벌군의 지휘봉을 쥐고 압록강의 섬 위화도에 섰다. 장맛비에 강물은 불어나고 병사들은 지쳐 갔다.
이길 수 없는 전쟁에 나라의 운명을 걸 것인가, 아니면 왕명을 어길 것인가. 그는 말머리를 돌렸고, 그 순간 고려의 운명도 함께 돌아섰다.
개경에서 노장 최영은 끝까지 맞섰지만 대세는 기울었다. 개혁의 설계자 정도전이 이성계의 곁에 서고, 끝까지 고려를 지키려던 정몽주가 선죽교에서 피를 흘리며, 474년 왕조는 조용히 무너지고 새 나라의 아침이 밝았다.
무리한 신사업(요동 정벌)을 밀어붙이는 오너(우왕·최영)에게 현장 최고 책임자(이성계)가 사업 타당성 보고서(4불가론)를 냈다가 묵살되자, 프로젝트를 중단하고 본사로 돌아와 이사회를 장악한 뒤 회사를 아예 새로 세운(조선 건국) 격이다. 과전법은 구 경영진의 지분을 정리하고 새 경영진에게 재배분한 구조조정이었다.
고려 멸망 3단계는 '팔팔-구일-구이'. 1388 위화도 회군, 1391 과전법, 1392 조선 건국. '팔팔하게 회군해서 구일 만에 토지 바꾸고 구이 먹으며 건국'으로 외우자.
위화도 회군은 '위'기의 '화'요일에 '도'로 돌아온 사건, 4불가론은 '사(4)장님 그건 불가능합니다'라는 보고서다. 1388년은 '일삼팔팔, 한번 삼키니 팔팔하게 정권 장악'.
요동 정벌 소식에 병사들은 남의 전쟁에 끌려가 죽는다는 공포에 떨었고, 회군 소식에 백성들은 전쟁이 끝났다는 안도와 왕조가 흔들린다는 불안을 동시에 느꼈다. 최영의 결기와 정몽주의 충절, 이성계의 결단이 부딪히며 한 시대가 저무는 비장함이 흐른다.
🌧️ 폭우 쏟아지는 압록강 위화도, 불어난 강물 앞에서 이성계가 말머리를 개경 쪽으로 돌리는 순간. 뒤편 하늘에는 저무는 고려의 노을과 떠오르는 새 왕조의 여명이 겹쳐 있다. 🐎🌅
최영의 요동 정벌론
요동 정벌을 주장·강행한 것은 최영과 우왕, 4불가론으로 반대하고 회군한 것은 이성계다. 인물을 바꿔 내는 선지에 주의한다.
전시과
과전법(1391)은 경기 지역 토지에 한해 전·현직 관리에게 수조권을 준 제도로, 전국 대상에 시지까지 주던 전시과와 다르다. 신진 사대부의 경제 기반이라는 목적도 핵심 차이다.
정몽주와 정도전
정몽주는 고려 왕조 유지 속 개혁을 주장한 온건파(선죽교에서 피살), 정도전은 역성혁명을 주도한 급진파(조선 설계자)다. 같은 신진 사대부라도 노선이 갈렸다.
고려 말 구체제를 무너뜨리고 조선 왕조 개창으로 이어진 결정적 전환점으로, 과전법을 통해 지배층과 토지 제도가 교체되는 역성혁명의 출발점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