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8년
살수와 안시성에서 수·당을 연이어 막아낸 고구려였지만, 70년 가까운 전쟁으로 국력은 바닥나 있었다. 강권 통치로 나라를 지탱하던 연개소문이 죽자 세 아들 남생·남건·남산이 권력을 다투었고, 대막리지 자리를 빼앗긴 맏아들 남생이 당에 투항해 오히려 침공의 길잡이가 되었으며 연개소문의 동생 연정토는 신라에 투항했다.
666년부터 총공세에 나선 나당 연합군은 668년 평양성을 포위했고, 내부 분열 속에 성문이 열리며 보장왕이 항복해 705년 역사의 고구려는 멸망했다. 당은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두어 옛 고구려 땅을 지배하려 했다.
이에 검모잠이 왕족 안승을 받들어 한성(황해도 재령)에서 부흥 운동을 일으켰고 고연무는 오골성에서 당군과 싸웠다. 그러나 내분으로 안승이 검모잠을 죽이고 신라로 망명했고, 신라 문무왕은 안승을 금마저(익산)에 머물게 하며 보덕국왕으로 책봉해 대당 전쟁의 지렛대로 삼았다. 고구려 유민의 힘은 훗날 발해 건국으로 이어진다.
연개소문 사후 아들들의 내분 속에 668년 나당 연합군이 평양성을 함락시켜 고구려가 멸망했고, 검모잠이 안승을 받들어 부흥 운동을 벌였다.
고구려 멸망과 부흥 운동
백제 부흥 운동 인물
고구려를 무너뜨린 것은 수 양제의 113만 대군도, 당 태종의 친정도 아닌 형제 싸움이었다. 연개소문은 죽으며 '너희 형제는 물과 고기처럼 화합하라'고 유언했지만, 맏아들 남생이 지방 순시를 나간 사이 동생들이 자리를 빼앗았다.
쫓겨난 남생은 원한에 눈이 멀어 아버지가 평생 싸운 당나라에 투항해 고구려 침공의 길잡이가 되었다. 성문이 안에서 열린 나라는 아무리 강해도 버틸 수 없었다.
나라가 무너진 뒤에야 검모잠 같은 이들이 왕족 안승을 받들어 다시 일어섰지만, 부흥군마저 내분으로 안승이 검모잠을 죽이는 비극이 반복되었다. 고구려의 마지막 교훈은 '적은 밖이 아니라 안에 있다'는 것이었다.
카리스마 창업 회장이 급서한 뒤 2세들의 경영권 분쟁으로 무너진 재벌이다. 장남이 경쟁사에 회사 기밀을 통째로 넘기며 적대적 인수가 완성됐고, 해산 후 일부 임원들이 재창업(부흥 운동)에 나섰으나 또 내분으로 갈라선 격이다.
'668 고구려 멸망' — 백제(660)보다 8년 뒤. 부흥 운동은 '검.안.고' — 검모잠(한성), 안승(보덕국왕), 고연무(오골성). 백제의 '복.도.흑'과 세트로 암기.
'남생'이는 '남'의 나라에 '생'을 맡긴 배신의 아이콘. 668은 '육(6)형제가 육(6)탄전 하다 팔(8)아먹은 나라'.
수 113만도 막아낸 나라가 형제 싸움으로 무너지는 것을 지켜본 백성들의 허탈함을 떠올려 보자. 검모잠과 유민들의 부흥 운동은 그 허탈함을 딛고 일어선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 평양성 성문이 안쪽에서 열리고 나당 연합군이 밀려든다. 성 위엔 세 갈래로 찢어진 깃발 🚩, 남쪽 금마저에서는 안승이 보덕국왕 책봉 문서를 받아 드는 장면 📜.
백제 부흥 운동 인물
고구려 부흥은 검모잠·안승·고연무, 백제 부흥은 복신·도침·흑치상지·부여풍. 두 세트를 교차시킨 선지가 시험마다 등장한다.
웅진도독부
고구려 멸망 후엔 평양에 안동도호부, 백제 멸망 후엔 웅진도독부. '고-안동, 백-웅진'으로 기구-지역 짝을 고정하라.
안승과 부여풍
안승은 고구려 왕족으로 신라에게 보덕국왕으로 책봉받아 활용된 인물, 부여풍은 왜에서 돌아와 백제 부흥군의 왕으로 추대된 인물. 추대 주체와 이후 행보가 다르다.
동북아 최강국의 몰락으로 삼국 시대가 사실상 막을 내렸고, 당의 한반도 지배 야욕이 노골화되며 나당 전쟁을 촉발했다. 유민의 저항 의식은 발해 건국의 뿌리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