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8년
서재필 등이 세운 독립협회는 독립문을 건립하고 만민공동회·관민공동회를 열어 헌의 6조를 결의했으나 황국협회를 동원한 탄압으로 해산됐다.
서재필 등이 세운 독립협회는 독립문을 건립하고 만민공동회·관민공동회를 열어 헌의 6조를 결의했으나 황국협회를 동원한 탄압으로 해산됐다.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보안회
갑신정변 실패로 미국에 망명했던 서재필은 의사가 되어 돌아왔지만, 조국이 열강의 먹잇감이 된 현실에 다시 펜을 들었다. 그는 백성이 깨어야 나라가 산다며 한글 독립신문을 만들고, 청나라 사신에게 절하던 영은문을 헐어낸 자리 곁에 독립문을 세웠다. 종로 거리에서는 백정 출신 박성춘이 연단에 올라 관료들과 나란히 나라의 앞날을 토론했다. 그러나 황제 자리를 위협한다는 모함 앞에서, 고종은 개혁 동지가 아니라 보부상의 몽둥이를 선택했다.
시민들이 광장 집회와 온라인 청원으로 정부 정책을 바꾸고 국회 설립까지 요구한 셈이다. 만민공동회는 촛불 집회, 헌의 6조는 국민 청원 합의문, 황국협회의 습격은 관제 데모를 동원한 여론 탄압에 해당한다.
독립협회 활동은 '문·신·만·헌·중'으로 암기. 독립문, 독립신문, 만민공동회, 헌의 6조, 중추원 개편. 몰락 원인은 황국협회의 황(黃)이 누런 몽둥이라고 연상.
만민공동회에서 만 명의 민이 공동으로 회의하니 만민공동회. 헌의 6조는 황제께 여섯 가지를 헌(바친)의견이라 헌의 6조. 황국협회는 황제의 나라를 지킨다며 협회를 때려잡은 협회다.
백정도 상인도 학생도 처음으로 나랏일에 내 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 벅참을 느꼈다. 그러나 몽둥이에 짓밟힌 광장을 보며 민중은 위에서 내려오는 개혁의 한계를 뼈저리게 깨달았다.
🏛️ 프랑스 개선문을 닮은 하얀 독립문, 그 앞 종로 광장에 갓 쓴 상인과 학생 수만 명이 모인 만민공동회. 📢 연단에 오른 백정 박성춘. 🪵 몽둥이를 든 보부상 무리가 광장으로 몰려오는 어두운 결말.
보안회
보안회는 1904년 일본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를 반대해 철회시킨 단체. 러시아 절영도 조차 저지는 독립협회, 일본 황무지 개간권 반대는 보안회로 나라와 이권을 짝지어 구분한다.
신민회
독립협회는 합법 단체로 입헌군주제 지향, 신민회(1907)는 비밀 결사로 공화정 지향. 정치 체제 지향이 다르다는 것이 최고 빈출 함정이다.
독립문의 위치
독립문은 청 사신을 맞이하던 영은문을 헌 자리 부근에 건립했고, 모화관은 독립관으로 고쳐 사용했다. 일본과는 무관하다는 점에 주의한다.
민중이 스스로 정치에 참여한 최초의 근대적 민권 운동이자 의회 설립을 시도한 선구적 사건으로, 이후 애국계몽운동으로 계승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