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3년
거란의 1차 침입은 서희의 외교 담판으로 강동 6주를 얻고, 3차 침입은 1019년 강감찬의 귀주 대첩으로 물리쳤다.
싸우지 않고 강동 6주 획득
현종 나주 피난, 개경 함락
거란군 궤멸 → 이후 천리장성 축조
거란의 1차 침입은 서희의 외교 담판으로 강동 6주를 얻고, 3차 침입은 1019년 강감찬의 귀주 대첩으로 물리쳤다.
거란(요)의 침입과 격퇴
귀주성 전투(박서)
993년, 80만 대군 앞에서 조정 대신들이 땅을 떼어 주고 항복하자고 할 때 서희는 홀로 일어섰다. 적진에 들어간 그는 소손녕의 기선 제압에도 꿈쩍 않고, 고려는 고구려의 후예이니 오히려 거란 땅이 우리 것이라 받아쳤다. 말 한마디로 전쟁을 끝내고 강동 6주까지 받아낸 역사상 최고의 협상이었다. 한 세대 뒤, 백발의 재상 강감찬은 일흔이 넘은 나이에 갑옷을 입고 귀주 벌판에서 거란군을 전멸시켰다. 붓과 칼, 두 영웅이 고려를 지켰다.
서희의 담판은 글로벌 대기업의 특허 소송 협박에 맞서, 오히려 상대 논리의 허점을 파고들어 유리한 라이선스 계약(강동 6주)을 따낸 전설의 협상가 스토리다. 귀주 대첩은 홈그라운드에서 상대 팀을 완파한 챔피언 결정전 승리와 같다.
거란 침입은 '서-양-강'. 1차 서희(담판), 2차 양규(분전), 3차 강감찬(귀주 대첩). '서양강(서양 강대국)도 못 이긴 고려'로 외우자. 귀주 대첩 1019년은 '십일(10) 십구(19)일 대승'.
서희는 '서'류 없이 말로만 '희'대의 협상을 해냈다. 강감찬은 이름부터 '강'하게 '감'히 쳐들어온 적을 '찬'물 공격(강물 터뜨리기)으로 쓸어버렸다.
80만 대군이 온다는 소문에 개경 백성들은 피난 봇짐을 쌌다. 항복이냐 결사 항전이냐의 갈림길에서 서희의 담판 성공 소식은 나라 전체의 안도의 한숨이었고, 귀주 대첩의 승전보에 백성들은 목 놓아 만세를 불렀다. 살아남았다는 기쁨과 스스로 지켜냈다는 자부심이 함께였다.
🗣️ 거란 군막 안, 서희가 지도를 짚으며 소손녕을 논리로 압도하는 장면과 ⚔️ 귀주 벌판에서 강감찬의 고려군이 함성을 지르며 거란군을 포위하는 장면이 나란히 펼쳐진다. 🏹🌊
귀주성 전투(박서)
귀주 대첩(1019)은 강감찬이 거란을 격파한 전투, 귀주성 전투(1231)는 박서가 몽골에 맞서 성을 지킨 전투다. 같은 귀주라도 상대와 인물이 다르다.
윤관의 동북 9성
강동 6주는 서희가 거란과의 담판으로 얻은 압록강 동쪽 땅, 동북 9성은 윤관이 여진을 정벌해 쌓은 성이다. '거란-서희-6주, 여진-윤관-9성'.
고구려의 천리장성
고구려 천리장성은 당의 침입 대비(연개소문 감독), 고려 천리장성은 거란·여진 대비(압록강~도련포)다. 시대가 400년 차이 난다.
팔만대장경
초조대장경은 거란 침입 때(현종), 팔만대장경은 몽골 침입 때(고종) 조판했다. '초조하면 거란, 팔만은 몽골'로 구분한다.
외교와 군사 양면으로 대제국 거란을 물리쳐 영토를 넓히고 자주성을 지켰으며, 고려·송·거란의 세력 균형 속에 장기 평화와 문화 융성의 기반을 마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