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1년
1231년 몽골이 침입하자 최씨 정권은 강화도로 천도해 항쟁했고, 김윤후가 처인성에서 살리타를 사살했으며 팔만대장경을 조판했다.
1231년 몽골이 침입하자 최씨 정권은 강화도로 천도해 항쟁했고, 김윤후가 처인성에서 살리타를 사살했으며 팔만대장경을 조판했다.
몽골의 침입과 대몽 항쟁
초조대장경과 팔만대장경
세계를 정복한 몽골 기병이 밀려오자 집권자 최우는 바다를 방패 삼아 강화도로 조정을 옮겼다. 그러나 섬으로 피한 지배층과 달리 본토의 백성들은 맨몸으로 적을 맞아야 했다. 처인 부곡의 승려 김윤후는 천대받던 부곡민들과 활을 들었고, 그의 화살 앞에 몽골 총사령관 살리타가 쓰러졌다. 20여 년 뒤 충주성에서 그는 노비 문서를 불태우며 외쳤다. 신분을 가리지 않고 공을 세우면 벼슬을 주겠다고. 나라가 버린 백성들이 오히려 나라를 지킨, 뼈아프고도 위대한 항쟁이었다.
글로벌 공룡 기업의 적대적 인수 공세에 본사만 안전한 해외 법인(강화도)으로 옮기고 장기 버티기에 들어간 상황이다. 정작 현장을 지킨 것은 비정규직 직원들(부곡민·노비)이었고, 팔만대장경 조판은 위기 속에서 회사의 정신을 지키려 만든 초대형 프로젝트였다.
대몽 항쟁 3대 키워드는 '강처팔'. 강화 천도, 처인성 김윤후, 팔만대장경. '강한 처세술 팔단'으로 외우자. 소실 문화재는 '황초'(황룡사 목탑·초조대장경)가 촛불처럼 타 버렸다고 기억.
살리타는 이름과 달리 처인성에서 '살리지 못하고' 전사했다. 김윤후는 '윤허 후' 노비 문서를 불태운 승려 출신 명장. 1231년은 '몽골이 하나(1)둘(2)셋(3) 하나(1) 구령 붙이며 쳐들어온 해'.
지배층은 섬에서 안전했지만 본토 백성들은 학살과 약탈 속에 버려졌다는 분노와 절망이 컸다. 그럼에도 처인성의 승리는 천대받던 이들이 스스로를 증명한 순간이었고, 목판 8만여 장에 한 자 한 자 새긴 대장경에는 전쟁을 끝내 달라는 온 백성의 간절한 기도가 담겼다.
🌊 바다 건너 강화도의 궁궐과 불타는 본토 마을의 대비. 처인성 토성 위에서 김윤후의 화살이 날아가고, 한쪽에서는 장인들이 대장경 목판을 새기고 있다. 🏹📿🔥
초조대장경과 팔만대장경
초조대장경은 거란 침입 때 만들어 몽골 침입 때 불탔고, 팔만대장경은 몽골 침입 때 새로 조판해 현재 합천 해인사에 보관 중이다. '만든 계기'와 '소실 여부'로 구분한다.
귀주 대첩과 귀주성 전투
귀주 대첩(1019)은 강감찬이 거란을 섬멸한 야전 승리, 귀주성 전투(1231)는 박서가 몽골에 맞서 성을 사수한 방어전이다. 몽골 침입 문제에서 강감찬이 나오면 오답이다.
강화 천도와 서경 천도 운동
강화 천도(1232)는 최우가 실제 단행한 항전용 천도, 서경 천도 운동(1135)은 묘청이 주장하다 좌절된 천도론이다. 실행 여부와 목적이 다르다.
세계 제국 몽골에 맞선 40년 항쟁으로 고려는 국체를 보존했으며, 팔만대장경이라는 위대한 문화유산을 남겼으나 전 국토가 유린되고 원 간섭기로 이어지는 대가를 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