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4년
영조는 탕평책으로 붕당을 누르고 탕평비를 세웠으며, 균역법(1750)으로 군포를 줄이고 『속대전』을 편찬했지만 사도세자를 뒤주에서 잃었다.
영조
정조
영조는 탕평책으로 붕당을 누르고 탕평비를 세웠으며, 균역법(1750)으로 군포를 줄이고 『속대전』을 편찬했지만 사도세자를 뒤주에서 잃었다.
무수리의 아들이라는 콤플렉스와 경종 독살설이라는 꼬리표를 안고 즉위한 영조는, 정통성 시비를 잠재우기 위해서라도 누구보다 성실한 왕이 되어야 했다. 그는 검소하게 먹고 밤새 정무를 보며 52년을 통치했고, 백성의 군포 부담을 줄이려 직접 궁궐 문 앞에서 여론을 들었다. 그러나 완벽주의 아버지의 기대는 아들 사도세자에게 지옥이 됐다. 노론과 소론의 정쟁 속에 아들이 자신을 위협한다고 판단한 그는, 한여름 뒤주에 아들을 가두는 결정을 내리고 8일 뒤 주검을 마주한다. 나라에는 성군, 아들에게는 비정한 아버지였던 왕의 두 얼굴이다.
파벌 싸움으로 망가진 조직에 '계파 인사 금지' 원칙(탕평책)을 세우고, 전 직원의 4대 보험료를 반값으로 깎아 준(균역법) 52년 장수 CEO다. 탕평비는 사옥 로비에 걸어 둔 사훈 액자다.
영조는 '탕균속신청사' — 탕평비, 균역법(1750), 속대전, 신문고 부활, 청계천 준설, 사도세자. '영조 균역, 정조 통공'으로 손자와 구분.
'영조는 군포를 반(2필→1필)으로 영(0)리하게 줄였다'. 탕평은 '탕수육 부먹·찍먹 편 가르지 말자'는 정신이다.
백성에게는 한없이 따뜻했으나 아들에게는 한없이 차가웠던 왕. 뒤주 앞에서 울부짖는 세손(훗날 정조)의 모습은 조선 왕실 최대의 비극이다.
성균관 앞에 우뚝 선 탕평비, 군포 두 필 중 한 필을 백성에게 돌려주는 손, 그리고 뙤약볕 아래 놓인 뒤주. 🪨🌾📦
균역법 vs 대동법
대동법은 공납 개혁(광해군 시작, 쌀 납부), 균역법은 군역 개혁(영조, 군포 2필→1필). 개혁 대상 세목이 다르다.
속대전 vs 대전통편
『속대전』은 영조, 『대전통편』은 정조 편찬. '속(續)은 영조가 이어서, 통편은 정조가 통합해서'로 구분.
영조 탕평 vs 정조 탕평
영조는 온건한 완론 탕평(당파 조제), 정조는 시비를 가리는 준론 탕평. 탕평비 건립은 영조만의 업적이다.
탕평책으로 정국을 안정시키고 민생 개혁을 단행해 조선 후기 중흥의 문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