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3년 ~ 1897년
흥선대원군의 쇄국에서 강화도 조약, 임오군란·갑신정변·동학농민운동·갑오개혁까지. 사건 순서 배열 문제의 최다 출제 구간.
어린 고종 대신 집권한 흥선대원군이 서원 철폐·호포제·사창제로 민생을 다잡고, 경복궁 중건과 당백전 발행, 비변사 축소로 왕권을 강화했다.
병인박해를 구실로 프랑스가 쳐들어온 병인양요(1866, 외규장각 약탈)와 제너럴셔먼호 사건을 구실로 미국이 쳐들어온 신미양요(1871, 어재연 항전) 후 척화비가 세워졌다.
운요호 사건을 구실로 1876년 체결된 최초의 근대적 조약이자 치외법권·해안 측량권을 허용한 불평등 조약으로, 부산·원산·인천이 개항되었다.
정부는 통리기무아문과 별기군을 설치하고 수신사·조사 시찰단·영선사를 파견했으며, 이에 맞서 이만손의 영남 만인소 등 위정척사 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다.
1882년 별기군과 차별받던 구식 군인들이 봉기해 대원군이 잠시 재집권했으나 청군이 진압, 제물포 조약 체결과 청의 내정 간섭 심화를 낳았다.
1884년 김옥균 등 급진 개화파가 우정총국 개국 축하연에서 정변을 일으켜 14개조 정강을 발표했으나 청군 개입으로 3일 천하로 끝났다.
1894년 고부 조병갑의 학정에 봉기한 전봉준의 농민군이 황토현에서 승리하고 전주 화약 후 집강소를 운영했으나, 일본 침략에 맞선 2차 봉기가 우금치에서 좌절되었다.
1894년 군국기무처가 주도해 신분제 폐지·과거제 폐지·과부 재가 허용 등을 단행하고, 2차 개혁에서 홍범 14조를 반포한 근대적 개혁이다.
1895년 일본이 명성황후를 시해한 을미사변 직후 단발령·태양력 채택 등 을미개혁이 강행되자, 유생들이 을미의병을 일으켰다.
1896년 을미사변 후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면서 열강의 이권 침탈이 극심해졌고, 같은 해 독립신문이 창간되었다.